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요즘은 아기자기한 소도시 여행이 인기다. 그중 중에서도 구라시키(倉敷)는 특별한 매력을 품고 있다. 아담한 도시 안에, 동서양이 어우러져 있고 과거와 현재가 섞여 있다. 전통의 아름다움과 현재의 새로움을 모두 느낄 수 있는 여행지, 바로 구라시키다.
구라시키는 일본 주고쿠(中國) 지방 오카야마(岡山) 현 남부에 있는 도시다. 오사카에서 신칸센으로 45분이면 닿을 수 있는 오카야마는 우리에게 익숙하진 않지만, 간사이와 규슈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인데다 일본 3대 정원인 고라쿠엔 등 볼만한 여행지가 모여 있다. 오카야마현은 일본 다른 지역에 비해 날씨가 좋아 ‘햇살의 땅’이라고도 불린다. 다른 애칭은 ‘과일왕국’. 풍부한 일조량이 맛있는 과일을 키워 낸다. 오카야마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모모복숭아’인 이유다. 오카야마에 가면 복숭아 철이 아니더라도, 곳곳에서 ‘모모’를 볼 수 있다. 복숭아 조형물부터 복숭아 과자, 복숭아 인형 등 앙증맞은 분홍빛이 ‘여기가 오카야마’라고 알려준다.
오카야마현의 인기 도시인 구라시키는 마을 중앙에 흐르는 구라시키 강을 중심으로 양쪽에 창고가 이어진 모습을 하고 있다. 강을 통해 구라시키로 쌀이나 목화 등 여러 물산을 옮겨 쌓아두어, 옛날부터 구라시키에는 하얀 벽의 창고가 즐비했다. 1978년 전통적 건조물 보전지구로 지정된 구라시키 미관지구(美觀地區)에는 에도시대부터 쇼와 초기까지 일본 전통가옥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건축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곳의 하얀 벽과 앙증맞은 운하는 영화 속 한 장면에 들어온 기분을 안겨 줄 정도로 이국적이다. 과거에 물건을 쌓아두었던 하얀 벽의 창고는 현재 복합문화공간이나 호텔, 갤러리 등 다양한 공간으로 변신해 여행자를 맞이한다.
구라시키 미관지구에서 먼저 찾아볼 곳은 운하다. 일본 전통 가옥과 근대건물이 사이좋게 이어져 있고, 그 사이에 흔들흔들 뱃놀이 즐기는 이들을 볼 수 있다. 열 명 남짓 탈 수 있는 나룻배는 아침 일찍 예약해야 탈 수 있을 정도로 인기다. 운하 옆을 산책할 때와 배에서 올려다 볼때 느낌이 다르다. 배를 타고 보면, 우아한 건물의 반영을 가까이 볼 수 있다. 물이 출렁이면 마음도 덜컹인다. 뭉쳐 있던 가슴에 틈이 생기고, 옛 사람의 풍류가 스며든다. 운하에 길게 잎을 늘어뜨린 버드나무가 운치를 더한다. 버드나무 아래에는 아마추어 화가들은 미관지구의 모습을 부지런히 스케치북에 옮긴다.
구라시키 미관지구를 즐기는 방법 중 하나는 인력거를 타는 것이다. 환한 미소와 넘치는 힘으로 무장한 인력거꾼이 미관지구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하나하나 설명해준다. 일본어를 모른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스마트폰 번역기로 친절하게 알려준다.
인력거를 타고 미관지구의 지형을 대략 파악한 후에는 천천히 산책하듯 돌아보는 게 좋다. 눈길을 끄는 곳 중 하나는 담쟁이넝쿨로 싸인 아이비스퀘어다. 옛날 방직공작으로, 지금은 전시장과 카페, 공방, 도자기 체험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아이비스퀘어 주변에는 아기자기한 소품가게가 모여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지갑을 열지 않고 나오기 힘들 정도로 귀엽고 예쁜 소품이 가득하다. 친구들을 위한 기념품은 이 부근에서 해결하는 게 좋다.
미관지구를 걷다 사람들이 줄서 있는 가게를 발견한다면, ‘유린안’일 확률이 높다. 100년 넘은 전통가옥을 개조해, 게스트하우스와 카페로 활용하고 있는 집으로, 푸딩이 유명하다. 이름도 시아와세(幸せ) 푸딩으로, 행복푸딩이다. 스마일이 그려진 푸딩만큼이나 메뉴판도 귀엽다. 여기저기서 ‘가와이’하는 감탄이 들린다. 엉덩이 모양의 모모 쥬스와 밥에 생달걀을 넣고 간장을 뿌려 먹는 타마고 카케고항도 인기 메뉴다. 자그마한 푸딩과 귀여운 메뉴판만으로도 즐거워하는 사람들 표정을 보니, 역시 작고 확실한 행복이 최고라는 생각이 든다.
푸딩을 먹고 나서 한가롭게 거닐다 보면, 그리스 신화에 나올 법한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구라시키 미관지구에서 빠트리면 안 되는 오하라미술관이다. 1930년에 문을 연 일본 최초의 서양식 근대 미술관으로 모네와 고갱, 세잔, 피카소 등 세계적인 거장의 원작을 전시하고 있다. 구라시키는 도쿄나 오사카에 비하면 작은 도시다. 세계적인 작품이 일본 소도시에 걸려 있어, 물음표가 떠오른다.
물음표가 느낌표로 변하기 위해서는 오하라 가문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오하라 가문은 구라시키 지역 대지주로, 방적사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오하라 가문은 고아원과 학교를 세우는 등 사회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다. 불우한 환경의 학생을 지원하는 장학회도 설립했는데, 장학금을 받은 학생 중 하나가 오하라미술관 설립에 영향을 미친 고지마 토라지로다.
당시 오하라 가문을 이끈 인물이 오하라 마고사부로. 그는 고지마 토라지로의 평생 친구이자 지원자였다. 토라지로는 마고사부로의 지원으로 그림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다. 또한 그의 후원으로 거장들의 작품을 하나씩 사들였다. 모네의 작품 ‘수련’도 토라지로가 직접 찾아가 구입한 작품. 1930년 문을 연 오하라 미술관은 토라지로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마고사부로의 헌사다. 거장들의 작품을 만난 감동만큼이나 마고사부로와 토라지로의 이야기가 긴 여운을 안겨 준다.
구라시키 미관지구는 데님으로도 유명하다. 1960년대 일본 최초의 청바지 원단이 생산된 곳도 구라시키다. 미관지구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먹거리 중 하나는 데님 아이스크림. 데님으로 만든 개성 넘치는 옷과 소품이 즐비하다. 아이스크림도 데님에서 나온 아이디어 상품. 특별한 맛은 아니지만, 독특한 사진 한 장은 확실하게 남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