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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상(巨商) 임상옥

글 김동일 소방기술사·전 화재보험협회 이사

흙수저의 쾌거

점원으로 시작해서 당대 최고의 부자가 된 임상옥. 그러면서 상인의 도리를 철저히 지키고, 개인의 부를 넘어서서 나라에 큰 이득을 가져다 준 타고난 장사꾼.. 임상옥은 실존 인물로서, 작가 <최인호>가 <상도>라는 제목의 소설로 엮어 그 이름을 다시 알렸다.

임상옥은 조선 후기의 무역상으로 의주 출신이다. 평안북도 의주는 조선과 청나라 사이 무역의 중심지였다. 대대로 상업에 종사했던 가문에서 태어난 임상옥도 아버지를 따라 의주 상인이 된다. 무지하고 가난하여 늘 신세를 한탄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임상옥은 천재적인 상업 능력을 가지고 <상도>를 깨우침으로 인해 조선 최고의 거부가 된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틀로 묶어 상업을 가장 천시하던 시절, 그는 미천한 장돌뱅이 신분에서 종3품의 부사직까지 오른 파란만장한 생애의 입지전적 인물이다. 요즈음 말로 <흙수저>가 이룬 쾌거의 장본인이다.

[그림 1] 의주 깍쟁이, 거상 임상옥 [그림 1] 의주 깍쟁이, 거상 임상옥

[그림 2] 장사는 이윤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사람을 남기는 것이어야 한다. [그림 2] 장사는 이윤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어야 한다.

중국인이 탐내는 조선 인삼

과거 중국 상인들이 조선의 상품 중에서 가장 탐내는 것은 인삼이었다. 약 효과가 좋아 중국 사람들이 선호하는 최고의 물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 상인 일부가 인삼의 명산지인 개성 인삼을 거의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늘 가격에서 손해를 본다고 생각해왔다. 이에 불만을 느낀 중국 상인들이 담합을 하여 조선 상단의 인삼을 사지 않겠다고 나섰다. 갖은 위험을 무릅쓰고 조선에서 천리 길을 넘어 중국으로 가져왔으니 도로 가져갈 일은 없을 것으로 판단한 얄팍한 <상술>이었다.

홍삼 1근당 은전 45냥짜리를 40냥으로 낮추어 달라며 불매 동맹을 한 중국 상인들과 한 판 힘겨루기가 벌어졌다. 임상옥은 제 값을 받지 못할 바에야 모두 불태워버리겠다고 선언하고 인삼 더미에 불을 질렀다. 처음에 설마 했던 중국 상인들은 불길이 점점 인삼더미로 번져갈수록 사색이 되었다. 중국 상인의 입장에서도, 1년에 겨우 한 번 오는 개성 인삼을 사지 않으면 자신들의 장사도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허겁지겁 달려가 임상옥을 말렸으나 임상옥은 막무가내였다. 결국 두 손을 번쩍 든 중국 상인들은 타버린 인삼 값까지 쳐서 작년의 두 배 값인 90냥을 지불해야 했다. 조선 상업 역사상 큰 사건으로 기록된 당시 임상옥의 <인삼 태우기> 전략은 죽기를 각오한 <위기관리>의 한 사례로서, <필사즉생>의 처절한 각오의 산물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반쯤 탄 인삼은 인삼이 아닌 도라지였다. 중국 상인들의 담합을 경험한 조선 상인들이 미리 준비해 간 것이다. 미래를 볼 줄 아는 임상옥의 상도를 함축하여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임상옥의 상도(商道)

의주상인과 개성상인의 같지 않음을 이렇게 이야기 한다. 의주상인은 <의리>를 생명으로 하는 이상주의자로 <신용>을 최우선으로 하고, 개성상인은 <흥정>을 상책으로 아는 현실주의자로 <이익>을 우선하였다. 그리하여 의주상인은 <상도>로 고객을 섬기고, 개성상인은 <상술>로 사람을 대한다 했다. 의주상인 임상옥을 중심에 두고 만들어진 후세의 말일 수도 있겠다.

임상옥은 <상도의 금언>이라할 명언 둘을 남겼다.

그가 평생을 통해 지켜나간 금과옥조 하나는 <상즉인(商卽人)>이다. 장사는 곧 사람이며 사람이 곧 장사라는 말이다. 장사는 이문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 <사람이야말로 장사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이윤이며, 신용이야말로 장사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자산>이라 생각하는 그의 마음이다.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 그는 <평등하기가 물과 같은 재물을 독점하려는 어리석은 재산가는 반드시 그 재물에 의해 비극을 맞을 것이며, 저울처럼 바르고 정직하지 못한 재산가는 언젠가는 반드시 그 재물에 의해 파멸을 맞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의 두 번째 마음가짐이다.

일찍이 <공자>는 상업이란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의를 추구하는 것이라 했고, 임상옥은 이 뜻에 충실하여 평생 인의를 중시하였다. 마침내 재물은 평등하기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 같다는 사실을 깨달아 언제나 재물보다 사람을 우선하였던 것이다.

후일 학자들은 임상옥의 상도를 다음의 3가지로 요약한다.

  1. 1. 성실과 정직 (성실함이란 엄밀히 말해서 正直하다는 뜻이다)
  2. 2. 미래를 내다보는 눈 (慧眼)
  3. 3. 성심과 신의 (성공은 誠心에서, 이익은 信義에서)

서울깍쟁이

고려의 수도 개경에는 두 개의 큰 도로, 남북대로와 동서대로가 있었는데, 두 길이 교차하는 십자로에 큰 시장이 섰다. 개경에서는 이곳의 상인을 <가게쟁이>라고 불렀다. 장사 잘하기로 유명했던 개경의 가게쟁이가 변하여 <깍쟁이>가 되었으니, 깍쟁이는 당시 <셈이 빠른 상인>이었던 셈이다.

조선조에 이르러 한양(서울)이 도읍지가 된 후, 종각(鐘閣) 근처의 시장이 남대문과 서소문 밖으로 확장되며 크게 번창하였다. 이곳의 상인들에 대해서도 여전히 그 호칭이 이어져 <서울깍쟁이>가 되었다.

세월이 흐른 후, 서울깍쟁이는 까다롭고 인색한 서울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이 되기도 하였지만, 서울 출신의 작가 <김훈>은 이렇게 말한다. ‘깍쟁이는 <깐깐한 품성>에서 유래하였다. 서울사람들의 일상적 마음 바탕인 깐깐한 품성은, <대도회지의 삶이 요구하는 엄격한 계약정신과 경우 바른 시민정신 그리고 반듯한 준법정신에서 유래한 일상적 생활감정>이었다’고

개성의 인삼으로 큰 부자가 된 <의주 깍쟁이>, 아니 조선의 거상 임상옥은 죽기 전 자신의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고 초야로 돌아가 일을 하다 생을 마쳤다. 후일 가포(稼圃)라는 호를 얻었는데, 그 뜻은 <채마밭을 가꾸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