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성원 법률사무소 광화 대표변호사
1. 연혁
실화(失火)라 함은 과실에 의한 화재로서 고의에 의한 방화(放火)와 대비된다. 「실화책임에 관한 법률」 (이하 '실화책임법'이라 약칭한다)은 과실에 의한 화재사고에 있어 손해배상책임을 규율한 법률인데, 그 의미와 쟁점을 살펴보기 전에 입법의 변천사(變遷史)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61. 4. 28. 법률 제607호로 제정된 실화책임법은 단 한 개의 조문, 한 줄로 구성된 매우 간단한 법률이다. 그 조문의 내용은 "민법 제750조의 규정은 실화의 경우에는 중대한 과실이 있을 때에 한하여 이를 적용한다"는 것으로서 민법 제750조의 특별조항임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특별입법에 의해 과실에 의해 성립되는 불법행위 중 중과실의 경우에만 불법행위가 성립되고 경과실의 경우에는 불법행위가 성립되지않게 되었다.
이러한 법률의 입법취지는 실화로 인하여 일단 화재가 발생한 경우에는 실화자 본인이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졸지에 생활터전을 잃게 되는 이재민이 되는데,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인근 다른 건물의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책임까지 지운다면 이는 너무 가혹하다고 보아 실화자의 책임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는 끊임없이 비판이 가해져 왔다. 목조가옥의 경우에는 위 법률의 입법취지가 일면 들어맞을 수도있으나 고층건물이나 공장의 경우에는 이러한 법률이 오히려 정의와 형평에 맞지 않는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고층건물에서의 생활이 일상화된 요즈음에는 어느 층에서 화재가 발생할 경우 그 상부층으로 화염이 확대되어 오히려 최초 발화장소보다 더 큰 피해를 입을 수 있고, 공장의 경우에도 영세한 개인공장이 옆에 있는 대형공장에서 발생한 화재사고로 인한 피해를 입는 경우에 대형공장은 보험에 가입하여 보상을 받지만 영세공장은 무보험 상태라 보상도 못받고 손해배상도 청구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에 끊임없이 위 법률의 정당성에 대하여 의문이 제기되어 왔고, 위헌성이 있다는 이유로 실화피해자는 물론, 담당 재판부가 헌법재판소에 위헌소원 또는 위헌심판을 제청한 사건이 몇건 있었는데, 헌법재판소는 1995년 실화자와 피해자 보호의 법익의 균형을 깨는 것도 아니고, 실화자를 과도하게 보호하고 실화피해자의 재산권을 과도하게 침해하는 것도 아니라는 이유로 헌법재판관 9인 전원일치로 합헌결정을 내렸다.1)
그러나 법률은 흐르는 물과 같이 시대에 따라 변하는 법! 위 결정이 있은지 12년만인 2007년 헌법재판소는 드디어 과실 정도가 가벼운 실화자를 가혹한 배상책임으로부터 구제할 필요가 있다고 하더라도 화재가 경과실로 발생한 경우에 일률적으로 실화자의 손해배상책임을 면제하는 것은 일방적으로 실화자만 보호하고 실화피해자의 보호를 외면한 것이라는 이유로 헌법불합치결정을 내리기에 이른다2). 9명의 헌법재판관 중 2명은 단순위헌 의견을 개진하였으므로 사실상 실화책임에 관한 법률에 대하여는 헌법재판관 전원이 위헌이라고 판단한 셈이니 불과 12년만에 전원 합헌에서 전원 위헌으로 헌법재판소의 견해가 뒤바뀌게 된 것이다.
이러한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라 2009.5.8. 법률 제9648호로 실화책임법이 전면개정되어 3개의 조문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여기서 실화책임법은 불법행위책임의 성립에 관한 특칙이 아니라 손해배상액의 감액에 관한 특칙이고, 연소피해에 대하여만 적용되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그 감액사유를 특정하였다.
과실있는 곳에 책임있고, 피해있는 곳에 배상이 있어야 한다. 이는 근대민법의 기본적 이념이요 우리 민사법의 기초원리라 할 수 있는데, 그동안 이러한 과실책임의 원칙에서 벗어난 이단적 법률이 너무나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하여 왔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사실 아무리 실화자의 처지가 딱하다 한들 아무런 잘못도 없는 피해자의 눈물과 희생위에 실화자에게 전부 면책이라는 우산을 씌워 보호할 이유는 없는 것이므로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과 그에 따른 법률의 개정은 지극히 정당한 것이며 잘못된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은 것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1) 헌법재판소 1995. 3. 23. 선고 92헌가4, 95헌가3, 93헌바4, 94헌바33 결정
2) 헌법재판소 2007. 08. 30. 선고 2004헌가25 결정
2. 의미
실화자의 책임을 면하게 함으로써 피해자 보호를 외면하는 것에 대한 비판과는 별개의 문제로 실화자에게 모든 화재피해에 대한 책임을 전부 부담시킨다는 것도 반드시 정의와 형평의 법리에 합치된다고 볼 수없다. 왜냐하면 실화로 인한 피해의 범위와 정도는 인접건물들의 구조, 화재 당시의 기상상태, 소방도로 및 장비의 확충 여부 및 소방관서의 진화속도 등에 달려있고, 이는 실화자 자신이 예측하기 어렵거나 관리,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또한 누구나 실화피해자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누구나 실화자가 될 수도있다. 따라서 실화로 인한 가혹한 부담으로부터 구제받을 필요성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으므로 전면개정된 실화책임법은 입법적 결단으로서 실화자의 전부 면책이 아니라 일정한 요건하에 책임을 감경받는 구제방안을 택하였다.
손해가 발생한 경우에 손해의 원인제공자를 따져서 그 가해자에게 손해 전부에 대한 책임을 지우는 것이아니라 피해자 과실은 물론 제반사정을 따져서 가해자의 손해배상책임을 제한하는 것은 손해의 공평, 타당한 분담을 지도원리로 하는 손해배상제도의 이상에 합치되는 일이다. 따라서 실화책임법에서 일정한 요건하에 특정한 손해에 대한 책임을 감액할 수 있는 것으로 규정한 것은 공적 목적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어서 합리성과 비례성을 갖춘 정당한 제한이라고 볼 수 있다.
위와 같이 책임이 제한된다 하더라도 모든 화재피해에 대하여 책임이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 화재로 인한 재해보상과 보험가입에 관한 법률에 의하면 특수건물3)의 소유자는 그 건물의 화재로 인하여 타인이 사망하거나 부상한 때에는 과실이 없는 경우에도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고 여기에는 실화책임법의 적용이 배제되며, 공작물 자체의 설치·보존상 하자에 의하여 직접 발생한 화재로 인한 손해나 계약관계의 당사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채무불이행책임에 대하여는 실화책임법의 적용이 배제되므로 실화자가 항상 모든 피해에 대하여 실화책임법에 따른 책임감경을 받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3. 쟁점
실화책임법은 실화자의 책임감경에 관한 법률로서(법 제1조) 실화(失火)와 연소(延燒) 피해에 대하여만 적용된다(법 제2조). 위 법이 적용되더라도 손해배상책임을 전부 면책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일정한 범위내에서 그 책임을 감액할 수 있을 뿐이다(제3조). 따라서 실화책임법의 적용에 있어 주된 쟁점은 실화인지, 연소피해인지, 감액비율은 어느 정도인지의 3가지로 나누어지게 된다.
차례로 살펴보면 우선 실화라 함은 중과실이 아닌 경과실로 인해 발생한 화재를 의미하므로 실화책임법의 적용에 있어서는 실화자에게 중과실이 있는지 여부가 제일 중요한 쟁점으로 다투어지기 마련이다.
중과실이라 함은 통상인에게 요구되는 정도 상당의 주의를 하지 않더라도 약간의 주의를 한다면 손쉽게위법, 유해한 결과를 예견할 수 있는 경우임에도 만연히 이를 간과함과 같은, 거의 고의에 가까운 현저한 주의를 결여한 상태를 의미하는데4), 구체적으로 우리 판례에서 중과실을 인정한 경우를 보면 포목상을 경영하는 자가 점포 아궁이에 연탄불을 피우고 철판을 덮어 두었는데 철판이 달아올라 문턱을 태우고 불이 번져 점포와 포목원단 등을 소훼하고 인접한 점포도 전소되었는데 전에도 철판이 달아오른 것을 발견한 인근주민이 개수하라고 권유하였던 적이 있었던 경우, 종업원이 야간영업 후 늦잠에서 깨어나 이불속에 엎드려 담배를 피우다가 담배꽁초를 맥주컵에 버리고 밖으로 나가면서 쓰러뜨려 불이 이불에 옮겨 붙은 경우, 등겨에 석유를 혼합하여 태우는 곳으로부터 2자 떨어진 곳에 휘발유 그릇을 놓아 둔 경우, 건조한 봄철에 건조주의보, 산불위험주의보, 산불경계령이 내려져 있는 상태에서 불이 붙기 쉬운 잡초가 나있는 곳에 담뱃불을 완전히 끄지 아니하고 담배꽁초를 버린 경우, 온풍기 내부에서 발생한 화재가 완전히 진화되었는지 확인하지 않은 채 아무런 후속조치 없이 온풍기를 내버려 둔 채 화재발생장소를 벗어난 지 5분 후에 온풍기 내의 불씨가 다시 일어나 재차 화재가 발생한 경우를 모두 중과실이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다음으로 연소(延燒)피해인지 여부가 쟁점이 된다. 연소(延燒)라 함은 일단 독립적인 연소작용을 가질 정도의 불길이 인근의 다른 물건에 옮겨붙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연소피해는 직접피해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발화점과 불가분 일체를 이루는 물건의 소실은 연소피해에 해당되지 않아 실화책임에 관한 법률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범위까지를 발화점과 불가분의 일체를 이루는 물건으로 볼 것인지는 상당히 모호하고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어떤 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그 화염이 인근의 다른 건물로 옮겨 붙었다면 이를 연소피해로 보는 것에 별다른 의문이 없겠지만, 연소는 상대적인 개념이므로 한공간 안에 있던 여러 개의 물건 중 어느 하나의 물건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다른 물건으로 화염이 번진 경우 물건 낱개를 기준으로 발화점인 물건만 발화점과 불가분의 일체를 이루는 물건으로 보고 다른 물건들이 입은 피해는 연소피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즉 발화점을 하나의 물건단위로 볼 경우에는 같은 공간내에 있는 냉장고에서 발화한 화재로 인한 TV의피해를 연소피해로 볼 수도 있는 것이며, 건물의 경우에도 하나의 건물 단위 전체를 발화점과 불가분일체를 이루는 피해로 판단할 수도 있지만 하나의 건물 중에서도 구분소유의 객체가 된 특정 방실만을 발화점과 불가분일체를 이루는 것으로 보고 벽체와 천정, 바닥 등으로 접해 있는 다른 방실의 피해를 연소피해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독립한 연소작용이 아닌 피해에 대하여도 연소피해로 보기 어려운데, 구체적으로는 건물내부의 배기덕트를 따라 화염이 인접상점들로 이동하여 주변상가에 그을음 피해를 입힌 경우에는 연소피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차량의 교통사고에 있어 추돌한 차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하여 추돌당한 차량의 적재함 및 적재물이 소훼된 경우에는 화재 전체가 직접 화재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실화책임법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시한 사례도 있다. 6) 과거 구 실화책임법에서는 아예 실화자의 책임을 연소피해에 대하여 면책시켰기 때문에 연소피해의 범위를 축소하고 직접피해의 범위를 폭넓게 인정하려는 경향이 있었으나, 실화자의 전부면책을 폐지하고 재판부의 재량에 따른 감액을 인정한 개정 실화책임법하에서는 연소피해의 범위를 제한할 현실적 필요성이 감소되므로 연소피해에 해당되는 범위를 점차 넓혀갈 것으로 예상된다.
끝으로 책임감경사유에 따른 감경비율이 쟁점이 된다. 민법 제765조에 따른 배상액의 감경이 배상자의 생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유에 국한되는 것임에 비해(따라서 법인의 경우에는 민법에 따른 감액이 불가능함), 실화책임법에 따른 책임감경사유는 화재의 원인과 규모, 피해의 대상과 정도, 연소(延燒) 및 피해확대의 원인, 피해 확대를 방지하기 위한 실화자의 노력, 배상의무자 및 피해자의 경제상태, 그 밖에 손해배상액을 결정할 때 고려할 사정 등으로 폭넓게 규정되어 있고, 이러한 모든 요건이 존재할 경우에만 감액되는 것이 아니라 그중 일부의 사정이 있는 경우에도 감액이 가능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 감액비율은 실무상 50% 내외가 제일 많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90%를 감액하는가 하면7) 20∼30%밖에 감액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아예 대부분의 책임을 감액해서 일정한 금액의 책임만을 인정할 수 있는지 여부도 논란이 될 수 있으나, 실화자의 경제사정이 지극히 열악한 경우로서 아무리 비율적으로 감액을 하여도 실화자에게 큰 부담이 된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비율을 따지지 않고 일정한 소액의 책임만을 인정할 수도있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책임감액에 있어서 우리 실화책임법은 법원에 그 감액에 관하여 상당한 재량권을 부여한 것으로 보이므로 실화자의 입장에서는 감액비율을 높이기 위하여는 자신의 경제적 어려움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을것이고,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그에 대한 반론으로 지나친 감액을 막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다.
4. 맺음말
이상에서 실화책임법의 제정 및 개정과정과 헌법재판소 결정의 변천, 실무상 문제되었던 주요쟁점 등을 일별해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실화 및 연소여부, 감액사유 등을 판단하기 위하여는 발화점이나 화재원인이 파악되어야 하는데, 대형 화재는 증거가 소실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어려움이 발생한다. 결국 사실확정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다. 즉, 재판은 객관적 사실을 확정하고 여기에 법률을 적용하여 결론을 도출하는 것으로서 법에 사실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법이 적용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달라질 수 없는 것은 객관적, 역사적으로 존재하였던 사실인 반면에, 법적인 평가는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옷을 갈아입듯 달라질 수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그동안 실화책임법의 변천과정과 그를 둘러싼 위헌논쟁 등을 살펴보더라도 법적인 평가나 논리는 상황에 따라 약간씩 달라져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실화책임법의 적용에 있어서 주된 쟁점인 실화 및 연소피해 여부, 감경비율 등에 관한 법리는 앞으로도 우리 사회의 법적 가치관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고 보는 입장과 시각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 사실은 변할 수 없다. 실화책임법의 적용에 있어서도 제일 중요한 쟁점은 발화점이 어디이고 화인은 무엇인지, 실화자와 피해자의 사정은 어떠한지 등의 사실문제로서 이러한 점들이 결국 실화책임법의 적용여부 및 적용범위를 가르는 요소가 될 것이다.
4) 대법원 2000. 1. 14. 선고 99다39548 판결
5) 대법원 1992. 4. 24. 선고 92다2578 판결, 대법원 1987. 4. 28. 선고 86다카1448 판결, 대법원 1955. 5. 26. 선고 55다73 판결, 대법원 1994. 11. 25. 선고 94다35107 판결, 대법원 1991.4.9. 선고 90다11509 판결, 대법원 2000.01.14. 선고 99다39548 판결 등
6) 대법원 2000.05.26. 선고 99다32431 판결
7) 서울중앙지방법원 2012. 6. 28. 선고 2011가단323397 판결은 쓰레기 처리업무를 담당하는 건물 경비원이 건물 뒤쪽의 공터에서 콘크리트로된 맨홀 안쪽에 쓰레기를 모아놓고 태우던중 갑자기 돌풍이 불어 불씨가 바람에 날려 인근에 있던 건물과 기계 등이 소손된 사안에서, 순간적으로 불어온 강한 돌풍에 불씨가 180cm를 넘는 벽을 넘어 날려가면서 화재가 발생하였고, 이러한 예상하기 어려운 자연력이 상당부분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는 등의 이유로 실화자의 중과실을 인정하지 아니하여 실화책임에 관한 법률을 적용한 후, 실화자가 경제적으로 어렵고, 피해자측도 가연성 물질을 적치해 두어 화재의 확대에 기여한 사정이 있다는 이유로 실화자의 손해배상책임을 피해자가 입은 손해액의 10%로 제한하였다. 위 사건에 대하여 보험자가 실화자의 책임을 지나치게 과다하게 제한하였다는 이유로 항소 및 상고가 제기되었지만 모두 기각되었다.